
“유림을 싸잡아 도의 법규를 넓혔고 뭇사람에게 푯대를 드리우고 향기로운 꽃을 떨치게 했네. 화려한 채색을 거두고 요사스러운 찌꺼기를 초월했네.” ―신작(申綽)의 ‘유목천부인이씨묘지명(柳木川夫人李氏墓誌銘)’ 중에서 조선시대 여성은 대부분 요조숙녀로 성장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정체성으로 삼았다. 담장 깊숙한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규수(閨秀)는 ‘여자’와 같은 의미였다.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해서 죄 많은 여자라는 의미를 담은 미망인(未亡人) 역시 여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단어였다.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덕무는 ‘사소절’에 이렇게 적었다. “남편과 시부모가 심하게 성질을 부릴 때 부인은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받들어야 한다. 더욱 공순한 태도를 보이고 조금도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남편과 성리학 지식 논쟁을 하고 남성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는 여성 학자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할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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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2, 2019 at 03: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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